- 시편109편
- 이우식 2024.6.28 조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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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처음 정착한 곳의 옆집에 다니엘집사님과 레베카집사님 부부가 살고 계셨다. 감리교인으로 매우 친절하셔서 지역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도 대접해 주시고, 피크닉도 함께 가곤 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서 다니엘집사님이 집 밖으로 불러서 하는 말이 자신의 집의 잔디에 우리집 잡초가 번져서 피해를 입었다고 몇 십 만원의 보상금을 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이해득실 앞에서는 그 친절함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물질에 참 약하다. 그것도 큰 금액이면 정신을 잃을 정도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물질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된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은 자신의 상태를 모른다는 점이다.
시편109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은 대적들로부터 둘러 쌓여 있다. 그들은 ‘악한 입’과 ‘거짓된 입’, 그리고 ‘속이는 혀’로 다윗을 우롱한다(2절). 까닭 없이 공격하기도 하고, 악으로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사랑을 갚은 자들이다(3, 5절). 사랑을 베풀 생각은 없고, 연약한 자들을 핍박하여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다(15, 16절).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는데, 삶 자체가 저주이어서 마치 저주로 옷 입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17-19절). 그런데 이들이 기도하는 자들이다(7절).
이런 사람들에게 다윗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4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24절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다윗은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못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권세가 없어 참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이 자신의 분노로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응하심을 6절부터 15절까지 10절에 걸쳐서 말한다. 당대에만 응하는 보응이 아니라 자자손손까지 진행되는 보응이다. 왜 이들은 하나님의 보응을 모르는 것일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들인데(7절) 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님에 대하여 편파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는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도 계신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은 경험하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두려움)한다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6절부터 15절까지 한 구절씩을 곱씹어 보라. 자신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권 앞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하고, 나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고 계심을 인식하고 분별 된 말과 행동, 삶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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